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드레이 예료멘코 (문단 편집) ==== 스탈린그라드 전투 ==== 1943년 여름, 독일군의 [[청색 작전]]이 시작되자 돈강의 스탈린그라드가 위험해졌다. 공교롭게도 당시 남동전선군(이후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으로 개칭) 사령관은 예료멘코의 서부전선군 후임인 [[세묜 티모셴코]]였는데, 스탈린은 아무래도 바로 직전 [[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]]에서 독일군에게 참패한 티모셴코가 못미더워서 8월 1일자로 예료멘코를 스탈린그라드 사령관으로 앉혔다. 예료멘코는 당시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서 다리를 절었지만, 스탈린에게 찾아가서 전선으로 내보내달라고 간청했고, 그 적극성에 감동한 스탈린이 못미덥던 티모셴코의 후임으로 예료멘코를 앉혔다고 한다. 정치장교 [[니키타 흐루쇼프]]와 같이 스탈린그라드에 내려온 예료멘코는 전선군 휘하의 62군과 64군을 점검했는데 시내 수비를 맡은 62군 사령관 안톤 로파틴이 매우 패배주의적인 언동을 보이는 것을 보고 바로 64군 사령관 [[바실리 추이코프]]로 교체했다. 추이코프군은 예료멘코의 생각대로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 시내로 끌어들여 소모시켰고, 계속 축차투입된 독일 증원군은 지옥의 시가전에서 하나하나 박살이 났다. 11월 소련의 우라누스 작전이 실행되면서 소련군이 독일군 제6군을 역포위했다. 독일군은 [[만슈타인]]의 지휘로 제6군을 구원하려 했으나, 예료멘코는 이를 격퇴했다. 이어 제6군은 항복했고, 이 전투를 기점으로 독소전쟁의 흐름은 소련군에 유리하게 된다. 예료멘코군은 포위된 6군을 뒤에 두고 [[카프카즈]]로부터 후퇴하는 독일 [[클라이스트]] 집단군(A 집단군)을 포위하려 했으나, 간발의 차로 실패하고 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